정치분과 자료실

2011/12/23 (14:15) from 61.76.184.212' of 61.76.184.212' Article Number :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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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곳간 열쇠 빼앗긴 주인

"일어나라! 짓밟힌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나라! 내일의 조국의 운명을 위해 일어나라! 국민이여 잠을 깨라!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다. 주인이 가져야할 귀중한 열쇠들을 우리에게 고용당한 하인에게 하나하나 빼앗기고 있다!” 이 지문은 이○○ 정권에 항거한 한 시민의 호소문입니다. 빈칸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승만’이다. 이 글은 4·19 혁명 당시 한 학생이 만들어 뿌렸던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라는 전단지에 쓰여 있는 문구다. 그런데 재밌는 건 빈칸에 ‘명박’을 넣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거다. 무엇이 닮은 것일까?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라고 뽑아 놓은 통치자들은 사익추구에 여념이 없고, 그 때문에 생활에 지친 시민들이 나라 걱정까지 하느라 잠 못 이루는 공사(公私) 전도의 현실이 아닐까?


국가의 책무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평등한 존엄을 보장하고 공동체의 보편이익을 모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국가는 지배하려는 자들과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투쟁하는 장이다. 권력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만큼, 국가는 보편이익으로부터 멀어진다. 국가가 기득권 집단의 사유물로 전락할 때, 국민은 권력을 잃은 정치적 나목(裸木)이 되어 약탈국가의 매서운 바람과 맞서게 된다.

국민을 억압하는 정치권력과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국민들 사이의 대결은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움직인 가장 중요한 갈등이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그런 대립의 역사를 극복하고 국민의 국가, 시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더디지만 꾸준히 계속됐다. 하지만 그 소중한 진보들은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다름 아닌 사익추구 찬미 세력이 공적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사유화, 정치의 사사화(私事化)다.

지난 몇 년간 시민들의 정신건강에 해를 끼친 큰 요인은 ‘조국의 운명’과 나라 곳간의 ‘귀중한 열쇠’가 사익추구 집단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불안과 분노였을 것 같다. 정부기관과 검경은 집권세력의 사조직처럼 돼버렸고, 공영방송은 정권과 재벌의 마이크로 전락했으며, 정부여당은 주권침해 위험까지 묵살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강행했고, 마침내 선관위 사이버테러라는 반국가적 행위가 집권여당발로 자행되기에 이르렀다.

국민들은 이제 이 나라 국가기관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다. ‘나는 꼼수다’는 이런 현실의 핵심을 짚어낸 탁월한 단어 선택이었다. 지금 국민들은 국가의 모든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 뒤에 숨어 있을 ‘꼼수’, 즉 사익추구의 진실을 본다. 국가 불신, 정치 불신의 근원은 공적 국가의 실종이다.

이는 분명 역사적 퇴행이되, 그저 비웃고 넘어갈 만한 시대착오적 퇴행만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1987년 이후 위축됐던 권위주의 세력과 그 과정에서 급성장한 재벌기업·언론권력이 만난 합성물이다. 그래서 이 정권의 통치양식은 구시대적이되, 이들이 추진하는 정치적 기획들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이다. 몇몇 정치인들의 부패와 비리 스캔들보다 무서운 것은 이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강화하고, 제도적 질서를 강자 중심으로 재편하는 작업들이다. 그러한 보수의 진지전에 응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적 국가의 건설이 가능해진다.

2012년이 다가온다. 동북아 지역 질서와 세계경제의 큰 흐름이 기로에 서게 되는 중대한 시점이다. 미국 금융자본주의와 유로존의 위기, 중국의 성장둔화와 버블 폭락의 위험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에선 대통령 선거가 있고, 중국에선 권력교체가 진행될 것이며, 김정은 치하의 북한은 한반도에 과거보다 더 큰 불확실성을 만들어낼 것이다. 위기의 시대다.

관성의 시간을 지배하는 게 제도라면, 위기의 시간을 지배하는 건 정치다. 이 나라의 국가가 기득권계급의 사유물로 남아 있을 것이냐, 새로운 시민국가의 시대가 열릴 것이냐가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2012년,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은 곧 2013년 이후 이 나라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열쇠를 되찾아와야 한다.

  = 신진욱 / 중앙대 교수·사회학 = ( 경향신문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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